사나 죽으나(2013.3.31)
지난 27일은 천안함 3주기였다. 북한의 도발로 46명의 젊은이들이 꿈도 펼쳐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부모들은 아직도 슬픔에 잠겨 있다.
방송에서 현충원 모습을 담았는데 어떤 어머니는 현충원을 매일 찾아가서 아들을 만지듯이 묘비를 닦는다고 했다. 어떤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 아들을 찾아간다고 하면서 아들에게 말하기를 “아들아 네 방 그대로 있다. 언제든지 다녀가라” 그랬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울컥했다. 나는 언제가 돌아올 유학 간 막내딸의 방을 잘 청소해놓지만 그 아버지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자식의 방을 그렇게 정돈 해두고 다녀가라고 하니 참 가슴 아픈 이야기다.
만일 죽음이 끝이라면 유가족들은 얼마나 허탈하고 허무한 일인가. 그 슬픔은 어떻게 하는가. 무엇이 위로가 되겠는가!
4년 전 1월 겨울밤에 얇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방모형제를 집까지 데려다주고 와서 감기에 걸렸다. 일주 일 앓다가 을지병원에 갔더니 폐렴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폐렴은 아이들만 걸리는 줄 알았다. 그래서 입원치료를 받았다. 교우들에게는 걱정할까봐 말하지 않았다. 힘들었지만 주일에 외출해서 예배를 인도했다. 우리 교우들은 내가 그 정도로 아픈 줄 몰랐을 것이다. 항생제가 잘 듣지를 않아 12일 가량을 입원했다. 당시 같은 병실의 나보다 몇 살 더 먹은 한 남자는 폐렴이 심해져서 자다가 죽었다.
내가 그때 ‘아 폐렴으로도 죽는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죽은 그 남자는 낮에 애인이 주는 빵을 받아먹고, 애인이 귓밥을 파주고, 웃고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렇게 죽어나가는 것을 보니까 죽는 게 별게 아니고 한 순간이구나 싶었다. 나는 나의 담당의사의 환자가 죽어나가
는 것을 보고 ‘아, 나도 죽을 수 있겠다’ 는 생각이 들어 기도했다.
“주님, 아직은 아닙니다. 이제 교회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데려가시면 어떡합니까? 나는 지금 죽으면 안 됩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 앞에 우리는 무력할 수밖에 없고, 허무와 절망과 슬픔만 남는다. 그때에 비로소 부활의 소중함을 실감하게 된다.
클리블랜드로 가는 한 배가 풍랑을 만나 침몰하기 직전이라 모두가 공포에 떨고 있는데 하늘을 향하여 평안하게 기도하는 한 부인이 있었다. 조금 있다 바다가 잔잔해지고 난 후 사람들이 그 부인에게 몰려왔다.
“부인, 그렇게 무서운 파도가 치는 와중에서도 어찌 그리 평안하실 수 있었습니까?”
“예. 저에게는 딸이 둘이 있는데 큰딸은 천국에서 살고 작은딸은 클리블랜드에 삽니다. 파도가 높이 칠 때 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오늘 제가 천국에 사는 큰딸을 보게 됩니까? 클리블랜드에 사는 작은딸을 보게 됩니까?’ 그러니 마음이 평안할 수밖에요.”
풍랑으로 배가 침몰해 죽으면 천국에 가서 큰딸과 살면 되고, 풍랑이 잔잔해져 살게 되면 클리블랜드에 가서 작은 딸하고 살면 되니 평안했다는 것이다.
이 부인은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는 것이다. 바울도 그랬다. 빌립보교우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죽는 것과 사는 것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두 사이에 끼여 있다. 죽어서 주님과 함께 있고 싶은 욕망이 더 좋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유익하리라” 어떤 날은 빨리 죽어서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교인들을 보면 사는 게 더 좋으니 사나 죽으나 다 좋다는 것이다.
사나 죽으나 다 좋은 것 이것이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의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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