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09.4.12)
강의 시간마다 건강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시던 한 교수님이 있었다. 그분은 대학시절 학교 씨름대회에서 우승도 했었고 몸도 다부져서 건강미가 넘쳐 보였다. 그분은 학문에 대한 열정이 많으셔서 유학도 갔다 오셨고 목회와 학교 강의를 병행했다. 강의도 아주 열정적이셨는데 특히 건강에 관심이 많으셨다. 강의 시간마다 몸에 좋다는 캄프리차, 영지버섯, 알로에 같은 것에 대해 하신 얘기들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그분의 강의 시간은 마치 한의학이나, 가정 의학 시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신대원을 졸업한 후 몇 해 되지 않아서 그 은사의 죽음을 알려 왔다. 그분의 사인은 간경화였고 당시 50대였다. 은사의 갑작스런 죽음에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때 깨달은 것은 사람의 일은 모를 일이고, 건강은 자신할 게 못 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한다 해도 죽음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영원히 살기를 원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냥 분해되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빼고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죽어도 다시 살기를 바란다. 유교도 다시 사는 것을 믿지 않는다. 죽으면 영혼이 안식처를 찾아 우주 어딘가를 떠돌아다닌다고 여긴다. 도교도 마찬가지다. 이런 극히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사람들은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힌두교도 그렇다. 그들은 죽으면 다시 환생한다고 믿는다. 죽어도 다시 돌아온다는 불교의 윤회사상과 닮았다. 불교는 죽었다가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든지 어쨌든 다시 돌아온다고 믿는다. 전생에 업보가 좋으면 남자로 돌아오고, 남자보다 조금 못하면 여자로 돌아오고, 그보다 더 못하면 짐승으로, 마지막에는 곤충으로 온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러나 자기 속의 모든 욕망이 완전히 사라져 부처가 되기 전에는 억겁이라도 다시 돌아온단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속에는 영생에 대한 소원이 있다. 노인들이 “빨리 죽고 싶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오래 살고 싶어 하고,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덤을 단장하는 것은 우리민족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다. 공자의 무덤, 마호메트의 무덤, 석가의 사리나 치아가 자랑스럽게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의 빈 무덤을 자랑한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이다. 만일 죽음이 그것으로 끝이라면 얼마나 허무하고 슬픈 일인가. 부활 신앙은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큰 의미가 있다. 우리의 죽은 부모님이나 형제가 다시 부활을 하고 영원토록 함께 산다고 생각해 보자 얼마나 큰 위로와 소망을 되겠는가. 그래서 기독교 문화권의 사람들은 죽음과 친숙하다. 죽음 앞에서도 담대함과 평안을 누린다. 부활신앙을 가질 때에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은 없다. 그러나 내세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 자체를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냥 잊고 살려고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슬픔과 탄식, 낙심과 좌절 그리고 두려움에 빠졌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을 환희와 기쁨으로 바꿔 놓았다. 부활신앙은 그들을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게 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인생에게 소중한 것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셔서 부활의 소망을 주셨기 때문이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부활의 소망이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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