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자(2007.4.1.)
여러 해 전 일이다. 퇴근하고 돌아오니 아내의 말이 오늘 집에 큰 일이 있었단다. 막내 하민이가(11개월)가 방안에 혼자 있었는데 까치발을 하고 문고리를 걸었단다. 아이는 불안해서 울고 어떻게 문을 열 방법은 없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할 수 없이 동네 어른의 도움을 받아 창문 유리를 깨고 방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어린 것이 얼마나 놀랐을까!
우리 인생도 그렇다. 아이가 제 스스로 방에서 나올 길이 전혀 없듯이 인생 스스로는 도무지 구원 받을 길이 없다. 톨스토이는 그의 인생론에서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구덩이에 빠진 상황을 두고 비유로 이야기 했다. 구덩이에 빠진 나그네가 살려 달라고 소리치자 지나가던 한 사람이 “중생이여 어쩌다가 빠졌나 그 자리에서 도를 깨우치라.”하고 지나간다. 또 한사람이 지나가다가 “인생이여 조심하여 두 번 다시 빠지지 않도록 하라”하고 지나갔다. 또 한사람이 지나가다가 나무를 놓고 내려가 그를 치료해주고 업어서 위로 올라와 구해 주었다. 톨스토이는 비유에 나온 세 사람을 두고 첫 번째 사람은 석가였고, 두 번째 사람은 공자, 세 번째는 예수라고 했다.
인생 스스로는 도무지 죄악에서 빠져 나올 길이 없는데 예수께서 오셔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시고 참된 행복과 평안을 주셨다. 하늘 보좌를 버려두고 자기를 낮추어 종의 형체를 가져 인생으로 오셨고 자기를 낮추시되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은 얼마나 귀하신 분인가! 아이들이 병이 들어 힘들어 할 때 그것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아프다. 자식을 낳아서 길러 보아야 부모의 사랑을 안다고 했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 옛말에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라고 했다. 내 자식이 조금 아픈 것도 마음이 아픈데 십자가에 달린 독생자 예수를 바라보아야 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겠는가?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피맺힌 절규에도 하나님은 아들을 외면하시고 심판해야 했다. 그 깊고 크신 사랑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어느 초등학생에게 교회에 다닌다고 반대하던 아버지가 있었다. 아들이 어느 날 자전거를 타고 건널목을 건너다 기차에 치여 숨졌다. 아버지는 교회를 찾아와 노발대발 하며 목사님을 나오라고 했다. 그는 목사님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내 아들이 죽을 때에 하나님은 어디 있었오?” 하고 물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목사님은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가 죽을 때에도 거기 계셨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참 의미심장한 말이다.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가 피 흘리는 골고다 현장에 계셨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슴 아픈 사랑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그저 피상적으로 바라보기 쉽다. 주님의 십자가는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십자가다. 예수님이 그 피로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저주이면서 동시에 구원의 완성이요 우리에겐 축복이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들이 힘들고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해 십자가에서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고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했다. (히브리서12:2,3) 우리가 얻은 구원은 그저 쉽게 얻은 구원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다.
이번 주간은 교회력으로 고난 주간이다. 서점에서 ‘미디어 금식’이란 슬로건을 보았다. 요즘 사람들은 TV, 인터넷, 오락 같은 것을 금하면 힘들 것이다. 큰 딸아이는 “밥을 금식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고난 받으시고 죽기까지 참으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한 주간이 되자.
댓글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