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없는 새는 없다 (2005.3.20.)
지난주간 교회를 개척하고 다시 재기한 친구 목사를 만났다. 상가교회였지만 아름답고 아늑한 분위기의 2층 본당과 교육과 교제를 겸하는 카페 같은 예쁜 3층 공간이 그의 취향을 잘 보여주었다. 오병이어라는 교회이름처럼 그와 함께하는 개척 멤버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헌신된 분들이라 금방 크게 쓰임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늘 소년처럼 꿈이 많았다. 그 꿈 때문에 십년 가까이 섬겨오던 안정된 담임목사 자리를 내어 던졌다. 많은 교인들은 그를 지지하고 따랐지만 당회원들에게서 오는 이질감이 그로 하여금 그 교회를 떠나게 했다. 그것은 그에게 아픈 상처였다.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얼마 있지 않아 위암을 선고 받고 제거 수술을 했다.
정채봉씨는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라는 글을 통해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있다. 그 내용은 상처를 입은 젊은 독수리들이 벼랑으로 모였는데, 날기 시험에서 낙방한 독수리. 짝으로부터 따돌림 받은 독수리. 윗 독수리로부터 할큄 당한 독수리 등 등 이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자기들만큼 상처가 심한 독수리는 없을 것이라고들 생각하고 죽자고 한다. 이때 독수리 중의 영웅 독수리가 나타나 죽음을 만류하며 “내 몸을 봐라 상처투성이가 아니냐. 이것은 겉에 드러난 상처에 불과하고 내 마음의 상처자국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일어나 날자꾸나. 상처 없는 새들이란 이 세상에 나자마자 죽은 새들 뿐이다. 살아가는 우리 가운데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라고 설득한다. 언젠가 비둘기들의 발가락을 자세히 본적이 있다. 발가락이 성한 비둘기는 거의 없었다. 한두 개 잘려 나가고 없든가 뭉툭한 발가락들이었다. 새들이 그들 나름의 아픈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듯이 우리네 인생살이도 많은 상처를 받고 살아간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도 그 내면에는 아픈 상처를 감추고 살아간다.
요즘 햇살은 따사로운데 바람이 불어서 은근히 춥다. 봄바람은 겨우내 정지되어있던 나무가 땅 속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게 하고 나무의 새싹이 돋아나는데 필요한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한다. 오히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나무를 크게 흔들어야 나무뿌리에서부터 수분과 영양분이 잘 전달된다고 한다. 우리 인생살이에도 시련의 바람이 불어 올 때가 있다. 그러나 인생이 신비로운 것은 아픔과 시련의 바람이 우리에게 더 큰 유익을 주는 점이다. 모진 풍상을 이겨낸 나무에서 상처의 아름다운 흔적을 보듯이 인생의 아름다움은 모진 상처를 견디어 내는데 있다. 역경은 극복하고 나면 삶에 큰 능력이 된다.
이번 한 주간은 교회력으로 고난주간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했다. 예수님이 받으신 상처는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아픔이셨다. 그는 배신과 멸시 천대를 받으셨고 아주 버림을 받아 죽임 당하셨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고 우리의 치료자가 되셨다. 우리에게 아무리 상처가 심하다 해도 상처투성이의 예수님께 비할 수는 없다. 예수님이 고통의 십자가를 질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다.
우리의 앞길에 시련의 바람은 끊임없이 불어오고 있다. 상처 없는 새가 없듯이 상처 없는 인생은 없다. 우리가 십자가의 그 사랑을 만난다면 상처를 진주로, 시련을 축복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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