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출발이다 (2011.2.6)
지난 해 추위로 상가의 옥상에 있던 감나무가 얼어 죽었다. 수도관을 감싸는 스티로폴로 잘 감싸 주었는데도 겨울 추위를 이겨내지 못했다. 동두천은 추워서 감나무 키우기가 어렵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화초나 나무를 키우다가 죽게 되면 속상하다.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오렌지 과수원 농사로 성공하신 분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어느 해 겨울 유례없이 혹독한 추위가 닥칠 것이라는 일기 예보가 있었는데 다른 과수원 주인들은 혹한으로 오렌지 나무가 죽거나 한 해 농사가 망치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그분은 놀라운 믿음의 소유자였다. 그는 한파가 닥치기 직전 오렌지 나무 주위를 돌며 큰소리로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제 나무들이 얼지 않도록 보호해 주세요.”
무서운 한파는 24시간 이상 지속되었다. 다른 과수원 주인들은 농작물이 죽을까봐 전전긍긍했지만 오직 그 농부만은 자신의 나무들을 지켜주실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를 드렸다. 한파가 물러갔을 때 주변의 과수원들은 모두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그 농부의 과수원은 조금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나무엔 크고 먹음직한 오렌지가 여전히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과수원을 거대한 담요로 덮어주신 것 같았다. 다른 과수원 주인들은 어리둥절했다. 그 농부가 기도할 때마다 놀리던 그들이 이제는 오히려 기도를 부탁했다. “여보게 다음엔 우리 과수원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게!”
대개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 생각으로 제한하기 때문에 기도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나도 내가 심었던 옥상위의 감나무를 위해 기도하지 못했다. 얼어 죽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만 하면서 그저 보온을 위해 스티로폴로 감싸주기만 했을 뿐이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기도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고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농사를 짓는 한 집사님 형제가 있었다. 모내기 철 어느 주일에 동생이 말했다.
“형님, 오늘은 교회에 가지 말고 모내기를 합시다.”
“안 돼, 농사가 덜 되어도 주일은 지켜야 돼.”
“형님, 손에 있는 모와 땅에 심겨진 모는 달라요. 시각을 다투는 이때 주일을 지키다니요? 주일 지키는 것은 다음 주일에 하고 오늘은 모를 심읍시다. 하나님께서도 이것은 이해하실 거에요.”
“아니야, 주일은 지켜야 돼.”
“형님, 그렇게 믿어서 잘 될 줄 알아요?”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은 형제는 그 일로 갈라섰다. 세월이 지났다. 그 형은 장로가 되었고 재물도 넉넉한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동생은 셋방에서 양식 걱정을 하는 처지가 되어 형의 도움을 받으며 살게 되었다. 성경에도 이와 닮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같이 살다가 갈라서게 된다. 그때에 롯은 가축을 기르기 좋은
땅을 선택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생존하기 어려운 곳으로 간다.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아브라함은 번영하여 부자가 되었고 롯은 아내와 재산을 잃고 겨우 목숨만 부지하게 된다.
당장은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해도 믿음으로 살겠다는 의지가 중요하다. 모든 결정권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그 어떤 불모지에서도 번영을 이룰 수 있다.
이제 음력으로 다시 출발이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크고 창대케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시다. 문제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삶의 원칙을 가지는 것이다. 그곳이 광야이든 사막이든 하나님의 시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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