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웨슬레의 생애<1703-1791>
제 1 장 웨슬레와 그 시대
웨슬레의 인격과 신앙과 그것을 토대로 한 메도디스트 운동은 직접적으로는 18세기 영국의 부패하고 무력하여진 종교와 도덕을 혁신하여 정신적 파산 상태에서 건져냈으며, 간접적으로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막대한 공헌을 끼쳤다. 그리고 그 여파는 다시 오늘날 전 세계 각국에 전파되어 인간 내심의 변혁과 사회 개혁에 위대한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웨슬레의 가문은 그의 증조부인 바돌로매 웨슬레로부터 요한 웨슬레(할아버지), 사무엘 웨슬레(아버지), 요한 웨슬레까지 3대를 내리 전도자의 집안이었다.
바돌로매 웨슬레는 웨슬레 가문에서 최초로 옥스포드 대학에서 학업을 닦은 자였다. 그리고 그의 증조모로부터 그 어머니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다 재덕이 겸비하였으며, 교회에 열심이었으며 청교도였다.
요한 웨슬레의 할아버지도 이름이 요한 웨슬레였는데, 1665년 영국정부가 Five mile act를 선포하여 설교를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 설교함으로서 4회를 투옥 당하고 고문 끝에 34세에 죽음을 당하며,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증조부 바돌로메오도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부친 사무엘 웨슬레는 학업을 닦는 여가에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방문하는 중에 장차 교역을 하겠다는 충동과 사명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들도 50년 후에 그 아버지를 본받아 옥중에 갇힌 자들을 열심히 찾아 보고 그들을 위로하고 도와 주었던 것이다.
웨슬레의 어머니인 수산나 부인은 열 세 살 때에 벌써 당시에 유행되던 교회와 또는 교리적 변론을 탐독하였다. 그녀는 별명이 "A theologian in Short dresses"이었을 만큼 신학적이었다.
요한웨슬레가 초대교부들의 신학을 연구하게 되고, 특히 크리소스톰, 닛사의 그레고리등 동방교부들을 공부하게 된 이유는 그의 부친과 어머니의 권고와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요한웨슬레과 그 형제, 자매들은 중고등학교를 가기 전에 이미 헬라어와 라틴어를 배웠다고 한다.
요한 웨슬레는 부모의 특별한 배려로 그가 10세 때인 1714년 런던의 챠터 하우스(Charter House)에 입학하게 된다. 집을 떠나 16세에 졸업하기까지 이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720년 여름 옥스포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취 대학에 입학하였다. 옥스포드 대학은 영국에서 굴지로 꼽히는 최고학부로서 그 명성이 높았지만 교내 풍기는 그리 아름답지 못하였다. 그가 후일 자기의 과거의 학창 생활을 뉘우치는 말을 한 것을 보아 환경의 영향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에 웨슬리는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 그리고 로의 '중대한 부름'이라는 책과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이란 명저들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 시기는 웨슬레의 생애에 있어서 한 큰 전환기였다. 그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속을 받았다는 중생의 경험은 이제로부터 13년 후에 얻었으나 하나님과 인류를 위하여 몸을 바쳐 살겠다는 목적을 세우기는 이때였던 것이다.
테일러의 저서에 감명을 받은 웨슬레는 이때부터 그의 유명한 '일지'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가 그의 일지를 쓰게 된 동기는 그의 시간의 선용과 생활의 반성을 목적함이었다. 그의 일지는 18세기의 영국 문학으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웨슬레는 면학가였다. 그리하여 그는 링컨 대학에 있으면서 히브리어, 아랍어, 희랍어, 라틴어, 논리학, 윤리학, 철학, 물리학, 웅변학, 시가, 신학 등 그의 연구 방면은 상당히 넓었다. 그가 문학사의 학위를 받은 것은 1727년이었는데 그는 당시 웅변가로서의 명성이 높았다.
링컨 대학 재학 중 웨슬레는 조기의 습관을 길렀는데 그는 이 습관을 평생토록 지켜 나가 80의 고령에 이르렀을 때에도 오전 4시에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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